독립투사의 딸, 나의 어머니 김예정 여사께…….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김예정 여사!
내일이면 어머니는 광화문에 준비된 광복60주년 기념 행사장에 나가십니다.
89세의 노구를 이끌고 그렇지만 사춘기 소녀시절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나가던 그 발걸음 보다 더 가볍고,
더 큰 설렘으로 광화문으로 나가십니다.

오랜 시절 가슴에 묻어주기만 했던 당신의 아버지인 김한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결정되었다는 보훈청의 연락은 어머니의 가슴을 활짝 연 낭보였습니다. 더군다나 건국훈장 독립장이라는 매우 명예로운 훈장이라는 연락이었습니다.

환한 웃음 띤 얼굴로 ‘이제 한이 풀렸어!’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조선조말 탁지부 주사로 공직에 근무하시던 당신의 아버지 김한 선생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면서 거의 집에서 뵐 수가 없었다지요.

상해로가 임시정부의 일도 하시고 다시 의열단원으로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시다가 김상옥 의혈단사건으로 5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하셨다지요.

나중에 또 수배가 되어 러시아로 피신하고 난 뒷자리는 어머니 표현으로 양복쟁이(고등계 형사)들의 감시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셨다지요.

김한 선생의 독립운동으로 넉넉하던 가세도 기울어졌고, 당신의 어머니 배소사 여사께서는 룡산고무공장에 나가고 당신은 소학교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무료로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알았습니다.

36년인가, 돌아가신 걸로 기록되어 있는데 러시아의 어디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조국해방의 염원을 안고 부릅뜬 눈으로 돌아가셨을 아버지 김한 선생의 비보를 10년이 넘은 해방이후에나 들으셨다지요.

저 어렸을적 집에 함께 사시던 맹꽁이 할아버지(우관 할아버지)로부터 비보를 들으셨다지요.

얼마나 얼마나 가슴이 무너져 내리셨어요.


지금 제가 생각해봐도 제 목이 꽉 메고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분이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억울하게 죽어갔기 때문이죠.



우관 할아버지! 너무 죄송해서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를 찾아온 우관 할아버지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 김한 선생의 동지인 우관 할아버지는 홀홀 단신이었죠.


약간의 망령기도 있어 동지의 딸인 어머니에게 몸을 의지하기 위해 우리 집을 찾으셨지요.
수년을 함께 살았지만 이불에다 소변도 보시고 코를 아무데나 푸는 문제로(그래서 맹꽁이 할아버지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죠) 해서 우리들과 같이 살기에 난감해졌고
결국 우관 할아버지는 집을 나가셨지요.

나중에 서울역 대합실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관 할아버지!
저의 외조부인 김한 선생의 기록을 찾아가는 과정에 우관 할아버지를 알게 되었고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일을 했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편하게 잘 모시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많은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그랬듯이 해방후에도 그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도 그 노고를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조국해방이 되었지만 김한 선생은 어머니의 가슴 밖으로 차마 나올 수 없었습니다.
분단과 이념갈등, 냉전시대가 시작하기 이미 10년 전에 이억 만 리에서 돌아가신 분이지만, 독립운동도 사회주의로 활동했다는 이유는 천형과도 같았고 단죄의 대상이 되는 시대를 거쳐 왔습니다.

10년 전부터 저와 천식형이 할아버지의 기록을 찾아나가자
‘고맙다’고 몇번씩 말씀하시던 당신의 모습은 잊혀지질 않습니다.



그런데 국회도서관에서 20년대 동아일보의 마이크로필름을 뒤져 찾은 한쪽의 기사는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김상옥 의혈단 사건에서 김한 선생의 최후진술이 요약되어 있는 기사였습니다. ‘조선사람이 독립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라! 일본이 이러한 이치만 이해한다면 나에게 감옥을 5년을 주어도 10년을 주어도 달게 받겠다’며 한 시간이 넘게 판․검사를 꾸짖는 진술을 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저는 기사를 계기로 김한 선생을 마음속의 사표로 정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야 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가시고 싶었던
이화여전을 포기하고 돈을 벌수 있는 서울여상을 가야했던 어머니!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 어귀에 항상 째려보고 있던 양복쟁이들 때문에 주눅 든 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했던 어머니!

분단과 냉전갈등의 60년간 어둠침침한 창고의 먼지속에 묻혀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 속에서 살아오신 어머니!

이제 됐습니다.
이제 밝은 세상의 광명속으로 그 사연들이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서울 상암에서는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는 남북 축구시합이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 북한의 광복절 대표단은 6․25 민족비극의 현장인 현충원을 방문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남과 북이 화해의 길을 점점 넓게 그리고 단단하고 확고하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북한에 남아 있는 정혜, 덕혜  두 누님들도 만날 수 있을 날이 올것입니다. 

어머니!
내일 광화문으로 향하는 어머니의 한걸음, 한걸음은 89년간 어머니의 가슴속에만 있던 김한 선생의 사연이 세상으로 드러나는 한걸음, 한걸음이 될 것입니다.

어머니!
수고하셨고, 너무나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2005. 8. 14.
어머니의 아들 우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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