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어머니의 긴 여정...그리고 한맺힌 3가지 사연


어머니의 긴 여정..그리고 한맺힌 3가지 사연

 

  우리 어머니 김례정여사의 살아온 삶은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역사의 굽이굽이를 넘어가면서 어머니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 그리고 기쁨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오래 사시면서 가장 ‘한’으로 남은 세 가지의 사연들이 있다.

 
 
우선은 어머니의 아버지 즉, 나의 외할아버지에 대한 사연이다.
외할아버지의 성함은 ‘김한’ 선생이다.

  김한 선생의 이력은 대략 이렇다.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대한제국의 탁지부 주사라는 벼슬을 하다 한일 합방 된 이후 ‘서울청년회’, ‘무산자동맹회’라는 청년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하신다.

  그 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의 법무국 비서국장을 역임하시다 의혈단의 국내 책임자격으로 다시 서울로 와서 의혈단원인 김상옥열사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에 폭탄을 대준 혐의로 체포되고 5년간 감옥을 사신다.

  출옥 후에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의 대표위원 중 한분으로 활동하시다가 30년 신간회사건이 터지면서 소련으로 도피하고 그 곳에서 37년에 사망하셨다.

  이렇게 독립운동에 전생을 바친 아버지를 모셨으니 어머니의 삶은 매우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감옥에 계시는 동안 당시의 동아일보에 ‘김한씨의 가족’ 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가족 탐방기사 중에 어머니의 어머니 즉, 나의 외할머니는 ‘곤궁한 생활을 헤쳐나가기 위해 고무공장 직공으로 나가고 어린 딸 례정은 아버지를 보고 싶다며 자주 울고 례정이 다니는 공덕회 소학교에서는 그 사정을 딱히 여겨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 주고 있다’ 는 대목에서도 당시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집 앞에는 한시 어머니의 표현으로 ‘양복쟁이’(형사, 기관원)들이 지키고 있어 늘 마음을 졸이셨고 보고 싶은 아버지는 거의 볼 수가 없어 아버지를 몹시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9형제 중 마지막 아들들인 천식과 원식형제가 외할아버지의 행적을 자세히 찾고 재판기록까지 찾아 독립유공자신청을 수차례 한 결과 마침내 2005년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그 해 광복절행사장에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을 때 속으로 한없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두 번째 사연은 고향땅으로 보내고 그대로 생이별을 하게 된 두 딸에 대한 걱정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을 두고 정혜 ∙ 덕혜, 두 딸을 보고 싶어 했고 딸이 간절히 보고 싶을 때면 임진각에 나가 북녘 땅을 한없이 바라보곤 하셨다.

  아버지는 87년 초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면서 북한에 있는 딸 정혜와 덕혜를 못보고 돌아가시는 것을 몹시 한스러워 하셨고 이를 지켜보던 어머니는 매우 서러운 대성통곡을 하셨다.

 

   세 번째 사연은 막내아들 원식에 대한 걱정이었다.

  집안이 안정되고 어머니의 연세가 환갑을 넘어서고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는 생활을 해나가던 때였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시절인 76년에 대학에 입학한 원식이 학생운동을 시작하면서 다시 우리 집은 정보기관의 감시대상이 되고 원식이는 가끔 피신도 하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의 환갑날, 원식이 학내시위사건에 연루되어 아침 일찍 인사를 하고 집을 나갔는데 오후에 형사들이 집에 들이닥쳐 환갑잔치가 엉망이 되었던 적이 있다.

  그러던 원식이가 강제 징집되다시피 군을 다녀오더니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81년 5월 광주항쟁 1주년에 맞추어 학내시위를 주도하고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심에서 1년형이었던 징역형이 2심에서 3년형으로 더 많은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정말 많은 눈물을 흘리시고 심지어 겨울에는 우리 아들이 차가운 감옥에 있는데 내 어찌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냐며 안방의 보일러를 끄시기도 했다.

  그 후 재야운동, 노동운동을 하는 아들을 보며 30여년을 걱정을 하며 살았는데 지난 17대 때 원식이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어머니의 큰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큰 고통, 큰 한의 세 가지 사연 중 이미 두 가지는 어머니의 큰 한을 다 푸셨는데 이제 남은 것을 북한에 있는 누님의 문제였다.

  그런데 이렇게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극적으로 해결될 줄은 아무로 몰랐다.

 

  이제 어머니에게 남은 여한이 없다.

  한 가지 남았다면 북한에 있는 덕혜작은누님을 만나는 일인데 이미 정혜누님으로부터 덕혜누님의 소식과 사진도 받았기 때문에 커다란 시름을 다 해소된 셈이다.

  현대사의 굽이굽이를 거치면서 본인이 선택하지도 않았고 고통스러운 시대가 만든 큰 멍에를 켜켜이 부여안고 살아온 우리 어머니!

  그런데 최근 7~8년 사이에 하나씩 하나씩 그 멍에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더니 이번에 누님을 만나시면서 이제 온전히 자유로워지셨다.

 

  돌아오는 길에 하신 어머니 말씀이 귓전에 그대로 울린다.

‘이제 됐다. 이제 됐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정혜 만나러 가야 한다고 결심하신 어머니.

우리의 모진 현대사는 모질게 걸어오신 우리어머니가 오늘 정말 자랑스럽고 존경스럽고 이렇게 아직까지 살아주셔서 정말 고마울 수가 없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무덤에 넣고 갈 반지를 끼워주고 있다. 

반지 낀 모습



반지를 낀 누님이 어머니를 힘껏 끌어안고 있다.



작별상봉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 팔다리 관절과 머리가 몹시 아팠다.


어머니 김례정여사의 청년시절사진
앉아있는 이가 아버지 우제화.
모친 옆 학생은 삼촌 우제순.
부친에게 안겨 있는 이가 지금 74세 된 큰 아들 우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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