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보(2014년 3월호)_"고통받는 서민들의 ‘현장’에 답이 있다"

[국회보 2014년 3월호] 고통받는 서민들의 ‘현장’에 답이 있다

우 원 식 의원 (민주당, 서울 노원 을)

우원식 의원은 “을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기치 아래 출범한 민주당 ‘을(乙)지로 위원회’ 위원장이다. 최근 서민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곳이다. ‘을지로 위원회라는 이름이 좀 가볍지 않을까’
고민하던 우 의원에게 “사람들이 쉽게 외울 수 있어서 쉽게 문을 두드릴 수 있으면 된다”며 ‘을지로위원회’라는 이름을 적극 추천한 이가 부인 신경혜씨다. 우원식 의원은 “나 때문에 포기한 게 많은 사람”이라고 부인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우원식 의원 자택을 찾아, 가족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우원식 의원 부부는 연세대 76학번 동기로, 이른바 운동권 서클이었던 ‘기독학생회’에서 함께 활동했다. 우 의원은 “처음부터 반해, 계속 사귀자고 했지만 (아내가)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우원식 의원은 본격적인 학생 운동에 투신하기 시작한다. 2학년 때인 77년 4월 경찰에 연행됐고 학교에선 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김한 선생의 외손자
우원식 의원의 어머니 김례정 여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의 아버지 김한 선생은 일제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하다 이국땅에서 쓸쓸히 돌아가셨다. 원식이도 ‘부당하다’고 지적하는 걸로 끝나지 않고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군 제대 후 복학한 우원식 의원은 1981년 5월 연세대 교정에서 반정부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구속된다.
당시 문제가 됐던 유인물에 쓸 종이 살 돈을 대준 사람이 회사에 다니고 있던 신경혜씨였다. 우원식 의원은 “이 사람에게 돈을 얻어서 유인물을 찍을 수 있었다”고 했다. 신씨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자금책’을 자청했다. 1심에서 1년을 선고 받았지만, 2심에서는 3년으로 오히려 형량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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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에서 써내려간 편지 


광복절 특사로 풀려날 것을 기대했지만, 우 의원은 포함되지 않았고 실망은 커져만 갔다. 고통스러웠던 순간, 우 의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신경혜씨였다.
그는 옥중에서 “경혜, 보아라”로 시작하는 편지를 수십 통 썼다. 책 본 소감도 적었고, 문병란 시인의 ‘새벽의 서’라는 시도 적었다. 한 달에 1번밖에 쓸 수 없어 빽빽하게 편지를 써내려 갔고 꼬깃꼬깃 여러 번 접었다.
1983년 12월 감옥생활을 마치고 우 의원은 신경혜씨를 만났다. 오랜 친구였던 두 사람이었지만 우 의원은 술 한 잔을 기울이며 마음을 고백했다. 신씨는 “화로에 불이 다 꺼진 줄만 알았는데, 불씨가 남아있는 것 같다”며 수락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인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우 의원은 그러나 “대학원까지 나온 데다, 누가 봐도 예쁜 딸이 제적당한 남자를 만나는데 반길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며 웃었다.
두 사람은 1984년 봄, 친구들을 모아놓고 약혼식을 올린 뒤 양가 부모님들에게 일방 통보했다. 그 길로 우의원은 양복을 빼입고 신씨의 집으로 갔다. 아침부터 무릎을 꿇고 앉아 저녁이 되었을 무렵 장인어른은 우 의원에게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자네, 내 딸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겠나.”
“예! 자신 있습니다!” 우 의원이 우렁차게 대답을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커졌단다.
결혼 이후, 우 의원은 구로동, 부평 등지에서 ‘위장취업’하며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신분이 발각될까 두려워 소규모 공장에 취직을 했다. 여러 번 쫓겨나기도 했다. 더 이상 ‘찍혀서’ 일할 수 없게 되자, 우 의원은 연세대 앞에 사회과학 서점 ‘ 서림’을 열었다. 서점은 ‘진짜 운동권’이라는 소문이 나서, 장사가 꽤 잘됐다고 한다. 노동운동 하는데 적은 돈이나마 보태기도 했다.
그런데 매일같이 단속과 수색이 계속됐다. 아예 서점 앞에 경찰이 정복을 입고 지키기도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노원구 공릉동에 87년 무렵 카센터를 열었다. 우 의원이 지금의 지역구와 연을 맺게된 계기다. 가까운 친구가 기술이 있어서 동업을 하기로 했다. 우 의원은 “지금도 내가 타이어 펑크 수리와 라이닝 가는 솜씨는 수준급”이라고 했다. 그런데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자, 전국적으로 유인물을 날라야하는 상황이 됐다. 그 때 김대중 후보를 지원했던 국민운동본부에 차를 갖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 카센터를 하던 우 의원이 차량을 지원했다.
우 의원은 “당시 민주개혁세력은 김대중 대통령이 꼭 당선되어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카센터를 거의 폐업하다시피하고 선거를 도왔지만, 정작 대선에선 지고 말았다. 그 때, 우 의원은 ‘지금은 카센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며 임채정 전 의원, 이해찬 의원 등과 함께 평민당에 입당했다. 평민당에 입당했다고 딱히 월급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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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신념을 갖고, 같은 세상을 꿈꾼 부부
아내 신경혜씨가 놀이방, 학원, 과외 등 온갖 일을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신씨는 “정치를 하면, 당장 돈이 없으면,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유혹에 넘어갈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생계는 내가 책임질테니 당신은 초심을 잃지 않고 뜻을 펼치라”고 했다.
부부가 같은 신념을 가졌고, 같은 세상을 꿈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원식 의원은 서울시의원을 거쳐 제17대 총선에서 당선됐고, 19대 국회에서 재선됐다.
“저희는 기독교 신자인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하고 힘없고 병든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사셨죠. 정치하는 사람도 결국 그 곳에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신경혜씨)
여성민우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신씨는 ‘행복한 가정상담코칭센터’ 를 이끌고 있고 최근에는 아동·가족 심리치료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우원식 의원은 “사실 제가 95년에 시의원에 출마했을때, 여성민우회에서 아내에게 구의원 출마를 권유해왔다. 그 때도 나 때문에 이 사람이 꿈을 접었다. 결혼하면서 공부의 꿈도, 정치적 진출도 접었다. 나 때문에 내려놓은 게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씨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같은 길을 가는데 있어, 역할이 달랐을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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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의 현장을 찾아다니는 을지로위원회
민주당 최고위원이기도 한 우원식 의원은 현재 민주당 ‘을지로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희가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을 위해 ‘민주정부를 수립하자’며 남대문시장을 누빌 때 많은 서민들이 호응을 해줬어요. 그런데 제가 강금실 서울시장 후보 선거유세차 다시 남대문을 찾았더니 ‘무슨 낯짝으로 또 왔냐. 너희가 당선됐어도 우리는 아무런 도움을 못 받았다’고 하시더군요.”
그 때 우 의원은 “민주주의는 민주당만의 것이고 서민들의 먹고 사는 것과는 관련이 없지 않느냐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민주주의와 민생이 떨어져버린 것이다. 민주주의만 챙기고 민생을 소홀히 해서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 어렵겠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후 ‘을지로 위원회’는 고통 받는 서민들의 현장을 찾아다님으로써 민주당의 변화와 신뢰의 상징이 됐다.
우원식 의원은 늘 ‘현장에 답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을지로위원회 활동 가운데 보람 있었던 일로 남양유업 사태와 아프리카 예술문화박물관 이주노동자들의 인종차별 문제를 중재했던 일을 꼽았다.
“불신 받는 정치를 신뢰 받는 정치로 바꿀 길은, 현장을 쫓아다니며 문제를 해결하는 을지로위원회 같은데 있습니다. 혁신의 내용은 ‘현장 중심’의 정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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