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외조부 김한 선생을 소개합니다.

저의 외조부 김한선생을 소개합니다.

'암살' 이라는 영화를 보고, 김원봉의 의혈단 김상옥 의사가 떠 올랐습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하면서 경성 시내를 뒤흔들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큰 사건입니다.
그 사건으로 구속된 김한 선생이 저의 외조부이십니다.

광복절 70주년,
영화 암살을 보며 이직도 미완인 우리의 완전한 해방을 꿈꾸며 저희 외조부를 소개합니다.
특히 일제의 재판정에서 한 최후진술은 늘 저의 좌표였습니다.


<독립운동가 김한 선생, 의열단 사건 관련으로 투옥되다>

▲ 동아일보 호외에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고 보도된 독립운동가 김한 선생

<이 글은 제 어머니 김례정 여사의 일대기를 그린 책 '어머니의 강'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내가 막 7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1923년 1월의 일이다.
  조용하던 마포 길에 느닷없이 일제 순사들이 들이닥쳤다. (중략) 갑자기 쳐들어와서 저리도 무지막지하게 덤비는 걸로 봐서는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서 너무 불안하고 불길했다. 아무래도 큰 일이 벌어진게지 싶었다. 우리는 늘 집 앞에서 감시하고 있던 일본 형사들을 '양복쟁이' 라고 불렀는데, 그 양복쟁이들이랑 순사들이 어머니를 마구 다그치면서 "김한 어디 있나?"라며 닥달하는 통에, 어머니는 또 얼마나 마음을 졸이셨을지...

  양복쟁이들이 아버지를 찾았던 이유는 바로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그 일 때문인데, 신문에는 '강도 예비사건'으로 기사가 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평화롭고 조용했던 마포의 기와집 주택가가 술렁거린 건 물론이고, 골목 모퉁이마다 지켜선 낯선 양복쟁이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노려보는 통에 주눅이 들어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런 사단이 난 지 한 열흘쯤 지났을까? 아버지는 마침내 순사들에게 붙잡혔다.


▲ 투옥되어 있을 당시의 독립운동가 김한 선생

 당시 아버지 김한 선생의 공소장에서 기술된 혐의의 요지는 이렇다.
 "상해에 있는 의열단원 김원봉이 조선독립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조선 내에서 폭탄을 사용하여 인심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 틈을 타 금품을 강탈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김한에게 폭탄을 보내고 김한은 김상옥에게 이를 전달하고 실행에 이르려다 발각되었다." (중략)

 아버지가 나중에 이 사건 재판의 최후 진술에서도 밝혔듯이 이 사건은 당시에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소위 불령선인과 그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한 조작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런 시국사건의 경우, 증거가 분명하고 당사자가 시인을 하는 사건보다는 증거가 불분명하면서 당사자가 부인하는 사건일수록 고통을 훨씬 많이 받는 것이 보통이다. (중략)


▲ 1923년 5월 19일자 '자살, 제령위반! 조리 있고 유창한 연설' 이란 제목의 동아일보 호외


 당시 동아일보 1923년 5월 19일자 '자살, 제령위반! 조리 있고 유창한 연설' 이라는 제하의 보도에 따르면 '김한은 세상을 비웃는 듯한 얼굴을 띠고 침착한 태도로 일어나 대략 한 시간 가량 흐르는 물같이 유창한 일본말로 자신의 사회관과 총독정치에 비평을 하였는데 방청석을 물론 재판장까지 그의 조리 있고 힘 있는 진술에 고개를 숙여 고요히 듣게 되었다.'라며 아버지의 최후진술을 소개하였다. 최후진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선 사람은 제령(制令)을 위반하지 아니하면 자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고정체(固定體)가 아니요 유동체(流動體)이다. 따라서 점점 향상하고 진화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라. 이것은 헤겔이나 다윈이 이미 말하였으므로 나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으나, 조선 사람도 역시 사람이라 살기를 위하여 향상하고 진화하기를 요구할 것은 그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사람이 향상하고 진화하는 데는 혁명이라는 것이 있나니 혁명이라 하면 매우 위험한 듯이 생각하나 사실 그러한 것이 아니다. 닭의 알이 변하여 병아리가 되는 것도 혁명이요, 올챙이가 변하여 개구리가 되는 것도 혁명이라. 혁명은 우주 만물이 살아가는 자연적 법칙이니 조선 사람이 살기를 부르짖고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요 또는 억지할 수 없는 일인즉 일본 사람은 이러한 조선 사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바란다.

  나는 시베리아로 만주로 상해로 십여 년 동안을 표랑하며 몇십 번이나 눈물과 아픔을 머금고 고생하다가 삼 년 전 조선으로 돌아올 때는 그래도 많은 기대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총독정치는 나의 기대를 산산히 깨쳐버리고 불평과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었노라. 교육으로나 산업으로나 어디를 보든지 총독정치는 조선 사람의 살기를 바라는 정치인가를 의심케 하였음이다.

  나는 이번 사건에 직접 또는 내심으로 관계한 일은 없으나 어찌 되었든 이번 사건은 총독정치가 자연히 만들어낸 것인즉, 이것만은 일본 사람이 알아준다면 나는 오 년 징역은 고사하고 십 년 징역이라도 달게 받겠다."




  한편 1923년 5월 13일자 조선일보는 '김한 공판 중 방청석 반응' 이라는 제하의 기사에 '구형보다 2년을 가중하여 김한에게 7년 언도', '청중도 대불평-판결이 가혹하다고', '정치범에는 예(例)가 있다' 등의 중간 제목을 붙이고, '핼쓱한 얼굴은 감옥살이의 고초를 말하는 듯' 하여 '방청석에 있는 가족으로 하여금 자연히 눈물을 흘리게 하더라', '논리가 분명한 김한의 답변에 방청객 모두가 탄복함', '피고는 조금도 급한 빛이 없이 조리 있게 나오는 답변은 실로 보는 사람들이 놀라더라' 등의 해설을 덧붙여 가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원래 세상의 이목을 끈 사건이기에 이날도 역시 방청객은 사면으로 구름같이 모여들어 방청석은 송곳 세울 곳 없이 빽빽하였다. 시간이 되자 병석에 있는 전우진, 리혜수 두 사람을 제외하고 피고 여섯 사람이 모두 모여 법정에 나오고 三矢 판사와 大元 검사가 입석하여 다음가 같은 판결이 있었는데, 피고들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긴장한 빛이 가득하였으며 방청석까지 진장하였다."


  ─김한 징역 7년, 윤익중 3년, 서병두 2년, 안홍한 1년, 정설교 1년 6월, 신화수 무죄.


  (중략) 그렇게 7년형이 선고되었던 아버지는 2심에서 5년형을 받고 1928년 동경 감옥에서 만기 출소하였다.


<독립운동가 김한 선생 약력>

1904년 대한제국 탁지부주사

1905년 동경 호세이(法政)대학 정치경제학과 입학 및 졸업, 변호사 자격 취득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사법부장, 법무국 비서국장 역임

1919년 7월 임시정부 산하 사료편찬위 위원 역임

1920년 조선청년연합회 창립

1922년 12월 경성양화 직공 파업 지원

1923년 1월 김상옥 관련 의열단 사건 국내책으로 검거, 1심 징역 7년, 2심 징역 5년 선고

1927년 4월 동경 감옥(박렬의 일본왕 암살사건 관련으로 이감)에서 만기출소

1930년 신간회 복대표위원회 중앙집행위원 선출

1931년 6월 신간회 사건으로 일제의 검거를 피해 국외로 나갔으나 연해주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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