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님을 떠올리면 장영달 선배가 생각납니다

1994년 1월, 늦봄 문익환 목사님의 마지막 길을 종로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종교인으로는 제일 존경하던 목사님이시며, 그래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나로서는 훌륭한 지도자이신, 그리고 통일운동의 선구자인 문익환 목사님이 가시는 길을 눈물을 감추면서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떠나시는 문익환 목사님은 활짝 웃고 계셨습니다. 장영달 선배의 품에서.

그날 운구 행렬의 선두에서 왜 장영달 선배가 문 목사님의 영정을 들고 계셨는지, 그 뒤로도 굳이 묻거나 누구에게 들은 바는 없습니다만, 그 뒤로 문익환 목사님을 떠올릴 때면 목사님의 영정을 들고 있던 장 선배가 항상 겹쳐집니다. 그건 단순히 강한 인상을 접할 때 당연히 남을 수밖에 없는 이미지의 잔상 때문은 아닙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자신이 목사이지만, ‘소금’이 되라는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그 뜻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소금은 소금으로 있을 때는 아무런 맛을 내지 못한다. 소금은 국이나 다른 음식에 들어가 녹아야만, 소금이라는 자기를 버려야 만 진정한 소금으로서의 가치를 발휘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만을 지키고자 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신을 버릴 수 있어야 진정한 가치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럴 것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을 떠올리면 장영달 선배가 떠오르게 되는 것은.

반성문 한 장을 쓰지 않고 버티다가 긴급조치 사건으로는 가장 긴 7년 징역을 살았던 일, 그것은 분명 자신을 버리면서 자신의 가치를 찾는 길입니다.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 그런 것이 바로 문익환 목사님이 말씀하신 소금의 의미일 것입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장 선배가 평민당에 입당한 뒤, 소위 재야 입당파는 민생현장에 제일 먼저 찾아 다녔습니다. 그 당시 현장에서는 정당활동, 정치인을 매우 냉소적으로 대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장 선배를 비롯하여 재야에서 입당한 사람들이 감수해야 했습니다. 저 역시 일은 일대로 열심히 하면서 질시어린 눈초리를 견디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 질시어린 눈초리에서 묵묵히 당을 위해, 당의 개혁과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그렇게 일하는 장 선배의 모습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소금이었습니다. 장 선배는.

문익환 목사님을 이야기하면서 장영달 선배를 이야기하면 아마도 제일 화를 낼 사람은 장영달 선배, 바로 자신일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문익환 목사와 자신을 비교하냐면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저는 장 선배를 이야기합니다. 장영달 의원, 그는 아직도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녹아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소금’입니다. 열린우리당에 그런 소금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자랑입니다.

2005. 3. 24
국회의원 우원식

댓글

Designed by CMSFactory, Modified by Wonwoo Kim